런웨이 넛지 - 돈을 벌 수 밖에 없는 자기결박

돈에 대한 역치가 낮다. 그런데 창업을 해야 한다.

솔직히 말해서 돈을 원하지 않는다.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타는 일이 익숙해서 자동차를 원하지 않는다. 부동산에도 일절의 관심이 없고 비싼 음식을 먹더라도 한끼에 2만원 이상이 들면 별로 효용을 느끼지 못한다. 창업은 적어도 나에게는 돈 벌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세상 바꾸기 위해서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세상을 바꾸려면 돈을 벌어야 한다. 내가 돈을 원하지 않더라도 ‘만드는 데에 인건비가 되었건 무엇이 되었건 돈이 드는’ 무언가를 만들게 될 것이며 ‘돈을 재분배하는’ 회사를 차려야 하므로 아이러니하게도 계속해서 돈을 추구 해야 한다.

  • 사람들은 싼값의 좋은 서비스를 원하기도 하지만, 지불용의 한도 내의 비싼 값의 탁월한 서비스나 브랜드를 원하는 경우도 많다. 예를 들어 애플 전자기기가 그렇다.
  • 설녕 싼값의 상품과 서비스를 원하시더라도 망하고 휘청거리는 회사와 제품을 원하시지는 않을 것이다.
  • 한 번 결제하면 회사와의 계약이 끝나는 제품을 파는 게 아니라, 서비스의 형태로 꾸준하게 유지보수되는 소프트웨어를 팔기로 했기 때문에 더더욱 회사를 안정적으로 운영할 수 있어야 한다.

이같은 여러가지 이유로, 탄탄한 재무적 기반이 필요하다.

돈이 필요한 상황을 인위적으로 만들기로 했다.

나의 가장 현금화가 쉬운 통장 잔고에는 약 3~4개월치 월급이 들어있었다. 이 잔고의 전액을, 1년 미만의 기간에 걸쳐 0원으로 만들기로 했다. 아 물론 돈을 물쓰듯이 쓰기로 한 것이 아니다. (물건은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 중도출금 또는 중도해지가 어렵거나 하게되는 경우 원금 손실이 발생하는 연금형 금융상품을 매일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납입하기로 했다. 수동으로 하는 것은 아니고, 자동으로 빠져나간다.

이것으로 나의 입출금 통장 잔고는 몇 개월 전부터 일종의 디데이 카운터처럼 동작하고 있다. 정확히 내가 계산한 날짜에 틀림없이 잔고가 0이 되는 아주 무시무시한 디데이 카운터가 되었다. 이뿐일까, 생활비로 매일 식비 얼마, 교통비 얼마, 커피값 얼마, 책값 얼마를 쓰고 나면, 더 빠르게 디데이가 다가올 수 밖에 없는 구조가 완성된다. 평균적인 고정비용을 엑셀로 집어넣으면 정확히 며칠 남았는 지 계산이 된다.

계산해보니 200일 남았다. J됐다.

욕이 아니다! J는 MBTI의 판단형을 뜻하는 J다. 자금을 계획적으로 관리하는 인간이 될 수 밖에 없다는 뜻이다. 나의 런웨이는 앞으로 6개월 남짓이다. 6개월 중 3개월이 지나기 전까지 유의미한 돈을 획득할 수 없다면 삶의 질을 떨어뜨리기 시작할 것이다. 평소 쓰는 식비의 절반만으로 밥을 해결하기 시작할 것이고, 1개월에서 2개월이 남은 시점에서는 그보다 절반의 비용으로 하루를 충당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하면 돈에 대한 역치가 올라간다. 당장 얼마라도 좋으니까 돈을 무조건 벌어야 하겠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모든 선택지를 거의 등진 채로 온전하게 창업을 선택한 지금 나에게는 직접 만든 프로덕트와 비즈니스로밖에는 돈을 벌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앞으로 좋든 싫든, 과거의 나에게 등떠밀려 돈을 벌게 될 것이다.

나와의 약속을 지키는 일에는 비교적 충실한 편인 것 같다. 타인에 의한 결박에는 한 없이 취약해지지만, 나 자신이 만든 족쇄에는 초연하고 담담하다.

무엇을 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은 많지만, 어쨌거나 나는 해내야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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